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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바비다비다입니다.
"한능검요약은 기초공사다."
한국사를 아는 것은 한국인으로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공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 글은 한능검요약, 일제 강점기, 민족 문화 수호 운동에서 시험에 자주 출제되었던 부분을 중점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교육정책

1.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

제1차 조선교육령(1911)의 목적은 일본의 통치를 순응하는 식민지민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보통학교 수업은 4년으로 보통교육과 실업교육에 중점을 두었고,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쳤습니다. 대학교육은 실시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제2차 조선교육령(1922)을 발표하고 말로는 일본인과 동등한 교육을 하겠다고 하면서 실제 교육 내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수업 연한만 6년으로 늘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형식적이었지만, 사범학교와 대학 설립의 규정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민립 대학 설립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3차 조선교육령(1938)은 전쟁 수행을 위한 황국 신민화 교육을 강화하는 교육 정책이었습니다. 소학교에서 윤리 및 체조 시간을 늘려서 황국 신민화 교육을 시행하였습니다.

제4차 조선교육령(1943)은 전시 동원 체재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교육 정책입니다. 수업 연한을 단축하였고 체련 시간을 개설하여 군사 훈련을 강화하였으며 조선어 과목을 완전히 폐지하였습니다.

* 사립학교 규칙(1911)을 정하여 사립 학교 수를 대폭 축소하였으며, 서당 규칙(1918)을 제정하여 서당의 설립과 운영을 통제하였습니다. 1941년에는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개칭하였습니다.


2. 언론 탄압

1910년대에는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면서 대부분의 민족 신문을 폐간하였습니다. 1920년대에는 민족계 신문의 발간을 조건부 허용하여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발간되었습니다. 1930년대 이후에는 조선중앙일보가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폐간을 당하였고 동아일보는 9개월 동안 정간되기도 하였습니다.


3. 일제의 한국사 왜곡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고 민족 정신을 말살시키며 독립 의지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어용학자들로 구성된 조선사 편수회를 조직하여 정체성론, 당파성론, 타율성론 등으로 식민 사관을 강조하였습니다.

정체성론이란, 한국 사회는 사회 경제 구조에서 내재적 발전 없이 오랫동안 고대 사회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여 일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일본이 통치를 하는 것임을 정당화하는 이론입니다.

당파성론이란, 한국인은 당파를 형성하여 싸우기를 좋아하는 분열적 기질이 있어서 결국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함으로 한국이 일본에 식민지가 된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하는 이론입니다.

타율성론이란, 한국사는 주체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발전해 온 나라라는 이론입니다.


4. 일본의 종교 탄압과 종교계의 민족 운동들

*개신교 : 일본은 1910년 안악 사건, 1911년 105인 사건 등으로 개신교 계열의 민족 지도자들을 옥에 가두고 악랄하게 고문하였습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일제의 신사 참배를 강요하면서 거부하는 종교 지도자 투옥시켰고 기독교 학교 폐쇄시켰습니다. 이러한 억압에도 개신교는 지속적으로 민중 교육 활동과 농촌 계몽 활동을 전개하면서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 불교 : 1911년에는 조선 총독부가 불교의 사찰을 관리 통제한다는 사찰령을 내렸습니다. 1922년에는 불교 교육 기구인 중앙학림을 폐쇄시켰습니다. 그러나 한용운 등이 사찰령 폐지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 대종교 :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대종교는 만주로 거점을 이동하였습니다. 미쓰야 협정을 통해서 대종교 포교 금지령이 내려졌습니다. 1942년 임오교변으로 주요 간부들이 체포되고 투옥되었습니다. 만주로 본부를 옮긴 후부터 본격적으로 독립 전쟁에 개입하여 중광단을 조직합니다. 후에 북로 군정서에 개편되어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 천도교 : 3.1 운동 이후 천도교는 일본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으면서 보안법에 의해서 탄압받았습니다. 제2의 독립 선언 운동을 계획하였고, 잡지 <개벽>, <어린이>, <신여성> 등을 발행하였습니다.

* 유교 : 친일 관료를 동원하여 대동 학회를 조직하여 유교를 억압하였습니다.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격하하였고, 그 역할을 축소하여 어용 교육 기관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5. 국어 연구와 한글 보급

* 조선어 연구회 : 1921년 국문 연구소의 전통을 계승한 조선어 연구회가 창립되었습니다. '가갸날(한글날, 1926)'을 제정하였고 잡지 <한글>을 창간(1927)하였습니다.

* 조선어 학회 : 최현배와 이윤재 등이 주축이 되어 조선어 연구회를 확대 개편하여 조선어 학회를 조직하였습니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와 외래어 표기법을 제정하였으며 잡지 <한글> 간행을 이어갔습니다. 우리말 큰사전 편찬 준비도 하였습니다. 1942년 일제의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해체되었다가 광복 후 한글 학회로 계승되었습니다.


6. 한국사 연구

* 민족주의 사학 : 우리 역사의 주체성과 민족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면서 식민 사학의 타율성론을 비판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신채호, 박은식, 정인보, 문일평 등이 있습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를 저술하였고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파악하였습니다. 낭가 사상을 강조하면서 민족의 기상을 강조하였습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였고 민족혼을 강조하였습니다. 정인보는 <조선사연구>를 저술하였고 민족의 얼을 강조 하며 조선학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문일평은 민족 문화의 자주성과 독창성을 주장하면서 조선의 마음을 강조하였고 조선학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 사회 경제 사학 : 유물 사관에 따라 우리 역사를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에 입각하여 설명하면서 식민 사관의 정체성론을 비판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남운이 있습니다.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저술하였습니다.

* 실증 사학 : 문헌 고증을 통해서 한국사를 실증적으로 연구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손진태, 이병도 등이 있습니다. 1934년에 진단 학회를 결성하였고 <진단 학보>를 발간합니다.


7. 문학 예술 활동

1910년대에 근대 문화 예술이 태동합니다. 최남선의 '신체시', 이광수의 <무정>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1920년대에는 <창조>, <폐허> 등의 동인지를 간행하였고 사회주의 문학, 신경향파, 카프 등이 결성됩니다. 식민지 현실과 민족의식이 작품에 반영됩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입니다.
1930년 이후에는 순수 문학, 저항 문학, 친일 문학으로 방향을 나뉘게 됩니다.

1923년 토월회가 조직되었고, 1931년에는 극예술 연구회가 만들어지면서 근대 연극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1926년에는 나운규의 <아리랑>이 제작 발표되면서 식민 치하의 민족 현실을 표현한 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홍난파의 <봉선화>, 현제명의 <고향생각>, 안익태의 <코리아 환상곡> 등 한국의 근대 음악이 소개되었습니다.
나혜석의 <서양화>, 이중섭의 <소> 등이 한국 근대의 대표적인 미술 작품입니다.
전형필은 일제가 약탈한 문화재를 수집 보존하여 간송 미술관을 세웁니다.

나운규, 아리랑


지나간 역사를 통해서 오늘을 다시 보게 됩니다. 지금의 삶이 아무리 힘들다 하여도 일제 강점기의 고통에 비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서 주어진 삶을 견디고 이길 힘을 얻습니다.

한능검요약 덕분에 많은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삶이 벅차고 견딜 힘이 부족할 때, 한능검요약으로 역사 공부 시작해 보시는 것 추천해 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불꽃이 피어나는 것을 느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대한민국 파이팅! 한능검요약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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