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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 읽기

바비다비다 2024. 7. 30. 14:53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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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경 교수가 쓴 ‘철학과 굴뚝청소부’ 꼼꼼하게 읽기

    서론

     

    1. 포스트모던 시대정신에 대한 이해

     

    하나의 사상이나 시대정신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하는 것은 이제 흔한 일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는 더 이상 특정 사상이나 시대정신이 세상을 지배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들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다양한 사회현상들은 '포스트모던하다'라는 형용사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맑스주의 같은 사조들은 시대착오적이고 낡은 옛 이야기로 여겨집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낡은 사상들을 대신해 새로운 시대정신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총체성, 계몽주의, 합리주의, 거대이론(Grand narrative)에 대한 반대를 표방합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정신은 무엇에 대한 반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기는 어렵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생각과 정의가 주장하는 사람마다 다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요소들을 무시하고 매도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포스트모더니즘 논의 속에서 잊혀진 문제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의 뒤에 오는 시대나 그 시대를 반영하는 이념을 말합니다. 따라서 근대란 무엇인지, '탈근대'란 무엇인지,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질문하고 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정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와 탈근대의 의미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근대란 무엇이며, 탈근대란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근대를 벗어나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해야 합니다. 이는 단지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거나 일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 제기되고 있는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사고하기 위한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에서 근대성과 막스주의를 검토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근대성 자체를, 그리고 '막스주의와 근대성'이라는 주제를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 근대와 탈근대, 그리고 새로운 시대정신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철학의 경계와 철학적 사유의 발전

     

    철학은 의심에서 출발한다고 합니다. 철학자는 기존의 지배적인 철학과의 투쟁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형성합니다. 칸트가 말했듯이, 철학사는 전쟁터와 같습니다. 철학자들은 지배적 사상 아래에서 보이지 않던 것을 찾아내고, 이를 통해 새로운 사고 영역을 열어젖힙니다. 이러한 철학적 투쟁은 새로운 철학적 사고를 가능하게 합니다.

     

    철학자들은 자신이 다른 사상가들과 어떻게 다른지, 어떤 점에서 새로운지를 입증해야 독자적인 사상가로 인정받습니다. 철학자는 보편성을 가지면서도 독창적인 사상을 제시해야 합니다. 철학은 이전의 사상을 넘어서고 새로운 사고를 형성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넘어서기는 발전이나 진화가 아니라 새로운 사고 영역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세 가지 수준의 넘어서기

    1) 지배적인 사상을 넘어서는 것: 철학자는 당시 지배적인 사상을 넘어서야 합니다. 이는 기존의 지배적 사상 안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사상을 형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칸트의 사상이 지배적이던 시대에 새로운 사고를 개척하려는 사상은 칸트의 사상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2) 하나의 철학적 흐름을 넘어서는 것: 새로운 사상은 기존의 철학적 흐름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의 흐름을 특징짓는 전반적 사고방식을 넘어서는 것으로, 새로운 철학적 사조를 형성합니다. 예를 들어, 로크가 데카르트를 넘어서는 것은 단지 한 철학자를 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3) 시대적 사고방식을 넘어서는 것: 철학자는 하나의 시대를 지배하는 특정한 사고방식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는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것으로, 거대한 변화가 철학자들에게 지각됨으로써 나타납니다. 데카르트가 중세 철학을 넘어 근대 철학을 열었듯이,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철학사 연구의 중요성

    철학사를 연구하는 것은 철학의 역사 속에서 그어진 경계선들을 찾아내고, 그 의미를 읽어내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다양한 사고 영역을 체계적으로 살펴보고, 인간의 사고를 극한까지 밀어붙여 보는 것입니다. 철학의 경계를 이해하는 것은 철학적 사유의 본질을 파악하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문제 설정의 중요성

    철학에서 문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사고의 방식과 결과가 달라집니다. 문제 설정은 사고방식을 제한하고, 중요한 가치와 개념을 포함합니다. 예를 들어, 법적 문제로 설정된 상황에서 다른 사회적, 심리적 접근은 고려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문제 설정은 철학적 사고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철학은 끊임없이 지배적인 사상과의 투쟁을 통해 새로운 사고를 형성합니다. 철학자는 독창성을 유지하면서도 보편성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철학적 사유는 세 가지 수준의 넘어서기를 통해 발전하며, 문제 설정은 철학적 사고의 방향을 결정짓습니다. 철학의 경계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것은 철학적 사고의 본질을 이해하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본론

     

    제1장 철학의 근대, 근대의 철학

     

    1. 데카르트 - 근대 철학의 출발점

     

    중세 너머의 철학

    근대 철학의 출발점에 대해 논하기 위해 먼저 '근대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근대 전체가 아닌 철학적 근대에 집중할 것입니다.

     

    근대란 중세와의 대비 속에서 중세와 구분되는 시기입니다. 이는 철학이나 역사 모두에서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근대 철학을 논하기 위해서는 중세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합니다.

     

    <신약성서> 중 한 권인 <요한복음> 1장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합니다. 중세는 신이 창조한 세상이었고 신의 손 안에 있는 시대였습니다. 신의 말씀을 연구하는 신학이 모든 학문을 지배했고, 성직자가 신의 말씀을 대리하여 학문과 대중의 삶을 지배했습니다.

     

    중세에서 존재란 신의 창조물이며, 진리란 신의 말씀에 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의 말씀을 전하는 성직자가 진리를 보장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성직자의 말에 따라 생활했습니다. 중세는 봉건 영주와 성직자들이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철학과 과학도 신학의 시녀였으며, 신의 말씀을 이성을 통해 설득하기 위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새로운 사고를 감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철학자 브루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받아들이고 우주를 무수히 많은 태양과 별들로 가득한, 끝도 중심도 없는 영원한 전체로 보았습니다. 그의 범신론적 입장은 교회로부터 용납될 수 없었고, 결국 그는 종교재판소에서 화형을 당했습니다.

     

    중세 철학과 과학은 신학의 한계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중세 과학은 신께서 창조하신 세계의 법칙을 인식하는 학문이었고, 신학의 전제를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중세에서 사고의 발전과 지식의 증가는 성서와 교회의 벽에 부딪혔습니다. 사고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중세에도 새로운 사고를 감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중세의 철학적 논쟁은 교회 안에서 신학의 이름 아래서도 계속되었습니다. 중세를 단순히 '암흑의 시대'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데카르트 역시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사고를 펼쳤습니다. 그는 <세계와 빛에 관한 논고>를 발표하려다 갈릴레이의 종교재판 소식을 듣고 포기했습니다. 대신 <방법서설>을 익명으로 출판했으며, 이는 교회와의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데카르트는 중세의 틈새가 벌어진 시기에 자신의 탁월한 사고의 힘을 보여주어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데카르트는 많은 반역적 사고를 모아 중세를 '슬며시' 뒤집는 역할을 했습니다.

     

    두 개의 코기토

    데카르트가 근대 철학을 열었으며, 따라서 '근대 철학의 비조' 혹은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근대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데카르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데카르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데카르트에 대해 말하려면, 근대 철학을 연 '제1원리'인 코기토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코기토(cogito)라는 말은 '생각하다'를 뜻하는 라틴어 cogitare의 1인칭 형태입니다. 즉 '나는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이 cogitare는 영어에서 생각하는 것과 관련된 단어들, 예컨대 cognition, recognize의 어원이 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철학에서 '코기토'라고 말할 때, 그것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가리키는데, 이 말은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이란 문장을 한 단어로 줄여 부르는 말입니다. 그 뜻은 알다시피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입니다.

     

    이 명제는 데카르트가 보기에 결코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명제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이 명제는 '나'라고 하는 주체가 존재하는 것은 바로 내가 생각한다는 것 때문이라고 본 점에서. '나'라는 존재를 신의 피조물로 본 중세적인 관점과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코기토란 명제가 근대 철학을 연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상당히 당혹스런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그것은 중세를 연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철학(형이상학)의 제1원리라고 생각했던 명제가 바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였다는 것입니다. 즉 동일한 명제가, 서로 대비되고 대립됨으로써만 구별되는 근대와 중세를 열었다고 하는 매우 아이러니한 사실이 철학사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를 이해하려면 잠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보아야 합니다.

     

    중세 철학을 연 사람, 중세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중세 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늘'이었고 근대 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늘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감히 말해도 될 정도이며, 그의 사고는 중세 철학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과 기독교의 교리를 종합해서 믿음과 이성을 종합하려고 했으며, 이로써 중세 철학 전체의 기초를 세운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플라톤의 철학이란 완전한 세계인 '이데아'가 있고, 실제 세계는 이 이데아의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인식은 이 그림자인 감각 세계에서 이데아의 세계로 상승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은,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플라톤 철학의 '이데아' 자리에 '신'을 놓고 플라톤의 철학을 따라 기독교의 교리를 전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신'이란 개념에 입각한 철학이 만들어집니다.

     

    이로 인해 중세 전반기에는 플라톤적인 철학이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중세 후기에 들어와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결정적인 영향력을 획득하게 됩니다. 이는 새롭게 얻어지는 지식이 증가하면서 기존의 플라톤적인 철학으론 그걸 감당하기 어려워진 데 따른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개념의 도움을 받아 새롭게 중세 철학을 집대성한 사람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그가 체계화한 이 철학을 흔히 '스콜라철학'이라고 합니다. 그의 철학은 자연에 대한 증가하는 지식을 신학의 틀 안으로 흡수하고 포섭하려는 것이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시 언급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인식의 목표는 신과 영혼이었습니다. 그에게 자연물의 인식이나 기타 유사한 지식은 그 자체로는 불필요한 것이었고, 오직 신학적인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성의 출발점은 '계시 진리'였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하려면 믿어라'라는 것이었습니다(이는 뒤에 스콜라철학에서는 '믿기 위해선 이해하라'는 명제로 바뀝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믿음을 위한 요구를 확립하는 것이 바로 이성의 의무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믿음을 겨냥해 제기되는 숱한 회의론을 반박하고 비판하려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활동하던 당시는 기독교의 지배가 아직 확립되지 않은 시기였고, 따라서 회의론은 기독교적 신앙과 이념이 지배적 위치를 확고히 하는 데 매우 불편한 걸림돌이었습니다.

     

    회의론자들은 감각에 주어진 것(감각소여, the given)에 대해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저기 있는 화분의 이파리들을 누구는 파랗다고 하고, 누구는 초록이라 하며, 누구는 연두색이라고 하며, 누구는 푸르스름하다고 합니다. 즉 보는 사람이나 보는 때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겁니다. 또한 이 말들의 경계 자체도 모호하여 뚜렷하지 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감각은 확실한 것, 불변의 진리를 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추리조차도 믿을 수 없다고 회의를 합니다. 곧 이성의 사고를 믿을 수 없는데, 이성의 사고 규칙인 추리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죠. 추리를 믿는 것은 이성에 대한 믿음을 전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모든 것을 의심하며, 확실한 것은, 진리는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들을 물리칠 묘안을 생각해 냅니다. 즉 회의론자들의 수많은 의심에도 불구하고 결코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게 바로 코기토,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사기를 당한다고 할 때, 사기를 당하는 '내'가 없다면 사기를 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무엇을 생각할 때, 회의론자 말대로 내가 잘못 생각할 수도 있고, 혹은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생각하고 있는 나'가 없다면 대체 생각한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의심하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의심하는 '나'가 없다면 의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는 회의론자들이 의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의심하는 사람(회의론자 자신)'이 존재함을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것만큼은 회의론자들조차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그는 자신의 철학의 '제1원리'라고 합니다.

     

    그는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렇게 존재하는 '나', 그리고 그렇게 존재하는 '나'가 여럿이 있는데, 그들이 모두 인정하는 지식, 예를 들면 2+2=4와 같은 수학적 지식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이유로 모든 사람이 긍정하는 도덕적 지혜 -이 부분은 조금 설득력이 부족한데, 데카르트 같으면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겠지요- 또한 확실한 지식이며 진리라고 합니다.

     

    그는 이제 "이 확실한 판단들은 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즉 "진리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확실한 것'이 단지 나라는 개인 안에만 존재하는 거라면, 즉 개인적인 특성에서 비롯되는 거라면 그것은 진리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확실한 것 -코기토, 수학적 진리, 도덕적 지혜 등-은 그것이 개인 아닌 다른 확실한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바로 이것이 그가 문제를 설정하는 지반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문제 설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확실한 판단, 곧 진리는 초인간적인 것, 인간을 넘어서는 어떠한 근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내면적 교사인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즉 이 확실한 지식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코기토처럼 확실한 지식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신이라는 확실하고 완전한 존재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코기토는 이처럼 신의 존재를 확증하고 증명하는 출발점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코기토는 중세 철학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데카르트의 문제 설정

    데카르트에게 확실한 지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철학은 불확실한 지식에 확실한 기초를 제공해야 하며, 특히 과학적 지식이 확실한 기초에 서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철학이 불확실한 기초에 서 있다면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철학의 출발점은 더없이 자명하고 확실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 자명한 기초는 어떤 의심과 질문에도 견뎌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데카르트는 스스로 회의론자가 됩니다. 확실한 것에 이르기 위해 의심, 회의라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를 '방법적 회의'라고 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다 의심해도, 의심하는 내가 없다면 의심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도달합니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우구스티누스와 다른 점이 없습니다. 다만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의론자를 반박해야 했지만, 데카르트는 스스로 회의론자가 되었다는 점 외에는 다른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유심히 보면 이미 출발하는 전제가 아우구스티누스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신에 대한 인식을 목표로 믿음을 공고히 하고자 했던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그는 코기토를 통해서 신이 아니라 확실한 지식에 이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이 확실한 출발점(코기토)을 그리스도 또는 신이 제공해 주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합니다. 반면 데카르트에게는 그걸 누가 주었는가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인간, '나'라는 자아가 자신의 능력으로써 확실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며,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 이 능력이 인간 안에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안에 있는, 이 확실한 지식에 이르는 능력을 그는 '타고난 관념', 즉 '본유관념(innate idea)'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데카르트에게 중요한 것은 이 본유관념이 어디에서 연유하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이성 안에 내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확실성을 보증해 주는 이성의 능력이 바로 자연에 대한 확실한 지식의 원천입니다. 즉 이성은 자연을 비추어주는 빛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똑같은 코기토가 아우구스티누스와는 정반대되는 역학을 하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그것은 신의 존재를 입증해 주는 확실한 출발점이었다면, 데카르트에게는 '나'라는 존재의 연원이 바로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임을 확인해 주는 출발점이요, 그래서 나 혼자만의 힘으로 확실한 지식에 이를 수 있게 해주는 출발점이었습니다. 즉 전자에게 그것은 신학의 기초를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면, 후자에게 그것은 과학의 기초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상반되는 역할을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맥락 속에 자리 잡고 있느냐, 어떤 문제 설정 속에 위치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마치 똑같은 사다리가 전봇대에 오르는 데 쓰이기도 하고, 불난 건물에서 빠져 나오는 데 쓰이기도 하듯이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주체, '나'라는 것이 신이 없어도 사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주체는 신이 없어도 내장되어 있는 본유관념 때문에 확실하게 사고할 수 있고, 확실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데카르트에게 '생각하는 나'는 신으로부터 독립된 존재고, 신으로부터 독립된 '주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신으로부터의 독립 때문에 데카르트의 사고는 '중세에서 벗어나는 사고'라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로써 철학은 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따라서 '주체'라는 범주는 근대 철학에서 가장 중심적이며 근본적인 범주입니다. '주체' 없는 근대 철학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신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는 독립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주체가 필요했던 것이고, 이 주체는 어떠한 이론적 명제도 이것에 근거를 두어야만 가능하게 되는 출발점이며, 그러한 명제를 구성하는 조직자가 되는 것입니다.

     

    부연하자면, 여기서 말하는 '주체'는 확실한 지식에 이르기 위한 출발점을 뜻합니다. 그것은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사고의 기초며,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지식의 기초입니다. 즉 모든 지식과 사고의 기초요 출발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를 출발점으로 삼은, 이후의 근대 철학을 주체철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반드시 자기의 '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주체라는 말에는 언제나 '객체'나 '대상'이라는 짝이 따라다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고하는 주체'라는, 이 주체가 사고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먹는 내(주체)가 있다면 먹히는 밥(대상, 객체)이 있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결국 근대 철학의 출발점인 주체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독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다른 피조물인 자연 세계(대상)로부터 인간이 분리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인간은 자연 세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왜냐하면 전자는 주체고, 후자는 대상이요 객체니까) 존재가 됩니다. 주체인 인간이 대상인 자연을 지배한다는 생각은 주체/대상의 이런 근대적인 분할에 따른 것입니다. 이로써 다른 자연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이론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나중에는 인문과학으로 발전하게 되지요.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대상과 분리되고 주체가 대상으로부터 떨어졌을 때, (인식하는) 주체가 (인식되는) 대상과 일치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벌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실제로 살아있는 벌과 일치하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보증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로써 주체가 대상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이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약 대상에 일치하는 지식, 곧 올바른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면, 이는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주체가 진리에 이를 능력이 없다는 게 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세요. 아까 주체가 신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던 건 '나'라는 주체가 진리에 이를 능력(이성)이 있다는 생각 때문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막상 주체를 독립시켰더니 진리에 이를 능력이 없다는 게 되면 얼마나 우스운 꼴이겠습니까? 결국 그건 독립할 능력이나 자격도 없으면서 신에게서 도망친 꼴이 되는 셈이지요. 따라서 데카르트로선, 그리고 이후 근대 철학으로선 진리를 인식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게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가 됩니다. '진리'야말로 주체에서 출발했던 근대 철학이 어떻게든 도달해야 할 목표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라는 범주를 독립시키자마자 진리라는 범주가 중요하게 따라다니게 됩니다. 즉 (인식)대상과 (인식)주관의 일치라는 뜻에서 진리라는 범주가 주체라는 범주와 쌍둥이로 등장하게 됩니다.

     

    요약하면 주체는 근대 철학의 출발점이요, 진리는 그 목표점입니다. 이 두 개의 범주는 근대 철학 전체의 기초와 방향을 특징짓는 가장 근본적인 범주입니다. 또한 이것은 근대 철학의 모든 질문 자체가 그것에 메일 수밖에 없었고, 그 대답 역시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던 지반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주체와 진리라는 범주로써 근대 철학의 문제 설정을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근대 철학의 경계는 이런 식으로 그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

    데카르트는 철학사에서 주체의 독립을 선언한 중요한 인물로, 그의 철학은 두 개의 실체, '연장'과 '사유'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중적인 의미에서 주체의 독립은 큰 문제를 야기했으며, 이는 데카르트 철학에서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졌습니다.

     

    이성의 타고난 완전성: 데카르트는 이성의 타고난 능력(본유관념)을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이 불완전한 경험을 통해서도 완전한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의 완전성 때문입니다. 완전한 개념은 불완전한 것에서 나오지 않으며, 이는 신이 인간에게 준 능력이라는 데카르트의 주장입니다. 따라서 그는 이성의 완전성을 주장하기 위해 신을 끌어들였습니다. 중세의 신학적 사고와는 달리, 데카르트는 신이 준 완전한 사고 능력 자체를 강조합니다. 이는 데카르트 철학에 중세적 요소와 근대적 요소가 공존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과학을 통한 진리 인식: 데카르트는 과학을 통해 대상적 진리, 즉 객관적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당시 과학의 급속한 발전과 관련이 깊습니다. 갈릴레이와 뉴턴처럼, 데카르트도 자연과학을 수학화하는 것이 진리에 도달하는 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수학적 지식이 가장 확실하고 완전한 지식의 모델이라고 여겼습니다. 데카르트는 철학을 통해 과학의 근거를 마련하려 했으며, 이는 근대 철학 전반에 걸쳐 과학주의라는 사고방식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정신과 육체의 일치 문제: 데카르트는 인간의 이성(정신)과 육체(연장) 사이의 일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이 문제는 이성과 감정, 욕망과 같은 인간의 불안정한 요소들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데카르트는 이성과 육체가 만나는 지점을 '송과선'이라고 제안하며, 이를 통해 정신과 육체가 교감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도덕론은 이성이 육체적 욕망과 감정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는 이성에 따라 행동하도록 하는 윤리학적 계몽주의의 선구자적 입장이었습니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이처럼 이성의 타고난 완전성, 과학적 지식을 통한 진리 인식, 그리고 정신과 육체의 일치 문제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중세의 신학적 사고를 넘어 근대 철학의 기초를 다지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근대 철학의 딜레마

    근대 철학의 딜레마는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의 일치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주체가 인식한 것이 대상과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방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근대 철학이 직면한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주체와 대상의 분리: 근대 철학은 주체(인식하는 자)와 대상(인식되는 것)을 분리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항만으로는 주체가 인식한 것이 대상과 일치하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는 진리 여부를 보증할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거울 비유: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본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거울에 비친 모습이 실제 자신의 얼굴인지 보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는 인식 주체(나)와 인식 대상(거울 속 나) 사이의 일치 문제를 상징합니다.

     

    조세희의 소설 예시: 굴뚝 청소부 두 명의 얼굴 상태를 통해 상대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얼굴을 추정하지만, 이는 실제 얼굴 상태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즉, 주체의 판단과 실제 대상의 상태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근대 철학의 인식론적 딜레마: 인식 주체와 대상의 일치 여부는 주체나 대상 스스로 보증할 수 없으며, 제3자가 필요합니다. 데카르트는 신을 끌어들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이는 근대 철학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중세와 근대의 차이: 중세 철학은 신과 교회가 진리를 보증했지만, 근대 철학은 주체가 신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진리의 보증 문제에 직면합니다. 근대 철학은 주체가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는지 입증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됩니다.

     

    과학혁명과 근대 철학: 과학혁명은 근대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과학도 진리를 보증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유아론의 딜레마: 다수의 주체가 서로 다른 판단을 할 때, 누구의 판단이 옳은지, 그것을 누가 보증할지의 문제도 존재합니다. 이는 주관적 진리가 서로 충돌할 때 발생하는 딜레마입니다.

     

    결론적으로, 근대 철학은 주체와 대상의 분리로 인해 발생한 인식론적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근대 철학의 문제 설정 자체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근대 철학은 다양한 인간사고 영역을 개척하는 동력이 되었지만, 진리의 보증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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